할아버지와 보청기

글: 윤수천, 그림: 이승현

우리 할아버지는 참 이상한 분입니다. 아빠가 사다 준 보청기를 어느 땐 귓속에 넣고 어느 땐 빼
놓으니 말이에요.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길에서 할아버지를 보고 “할아버지!” 하고 불러도 대답을 안 할 때 보면 귓속에 있어야 할 보청기가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지 뭐예요.
어제만 해도 그랬습니다. 도서관에서 집에 오려면 동네 경로당을 지나와야 합니다. 경로당을 막 지나오는데 할아버지가 등나무 밑에 앉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나는 반가워서 “할아버지!” 하고 불렀는데 할아버지는 내 말을 못 들었는지 계속 친구들과 이야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뿔이 나서 얼른 경로당을 지나와 버렸습니다. 속으로는 ‘또 보청기를 빼 놓으셨군!’ 했지요.
나는 할아버지를 보자 인사 대신,
“할아버지, 아까 또 보청기를 빼 놓고 계셨죠? 그렇죠?”
했습니다.

“내가 언제?”
“경로당에서요.”
“아, 그거…….”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고 나더니, “차차 알게 될 거다.” 하며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그게 언젠데요?”
할아버지는 대답은 안 하고 웃기만 했습니다. 곁에 있던 할머니도 덩달아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뭔가 숨기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렇게만 알아 둬라. 허허허.”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나는 엄마한테 달려가 다 말했습니다.
“그래? 정말 할아버지가 그러셨단 말이지?”
“제 눈으로 본 것만도 여러 번이라니까요. 할아버지는 종종 보청기를 빼 놓으세요. 게다가 더 수상한 것은요, 할머니도 웃기만 할뿐
통 말씀을 안 하시는 거예요.
이상하지 않아요?”
“그러게 말이다. 왜 잘 들리는 보청기를 빼 놓으신다지?”
엄마가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엄마, 혹시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신 거 아니에요?”
“얘는…….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연세가 많으시지만…… 그럴 리는 없다.”
엄마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올해 여든다섯 입니다. 하지만 식사도 잘하고 나들이도 잘합니다. 귀가 조금 어둡다는 것만 빼고는 특별히 아픈 곳도 없습니다. 오히려 다리가 아프다고 하는 사람은 다섯 살 아래인 할머니입니다.
아빠는 귀가 어두운 할아버지에게 보청기를 사다 주었습니다. 지난해 가을입니다. 외국에 출장 갔다가 오던 길에 선물로 사 왔습니다.
“이야, 이렇게 잘 들리는걸.”
보청기를 귓속에 넣고 할아버지는 입이 함박만 하게 벌어졌습니다. 이를 본 우리 가족은 다들 기뻐했고요. 이젠 할아버지하고 이야기를 해도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어졌거든요. 할아버지 역시 우리 눈치를 살필 일도 없어졌지 뭐겠어요.
이렇게 되자, 엄마는 왜 진작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며
후회했고, 형과 나는 작은 소리에도 신경 쓸 일이
없어졌다며 좋아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빠가 사다 준 보청기를 끔찍이 여겼습니다. 낮에는 물론 밤에도 빼 놓지 않았습니다. 주무실 때는 빼 놓는 것이 좋다고 아빠가 말씀드렸는데도
할아버지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할아버지가 요즘엔 가끔 보청기를 빼 놓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하다 못해 수상할 수밖에요.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중대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할아버지가 경로당 할아버지들을 만날 때면 보청기를
빼어 주머니에 넣는다는 것이었지요.
그것을 알려 준 사람은 공부보다는 축구를 더 좋아하는
우리 형이었습니다.
며칠 전 내가 “형, 있지, 할아버지가 가끔 귓속의 보청기를
빼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데 그 이유가 뭘까?” 하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 말을 듣고 형은 하나뿐인 동생을 위해
할아버지의 뒤를 몰래 밟았다는 거 아니겠어요?
형은 누가 뭐라 해도 하나밖에 없는 나의 형이었습니다.

“정말이야, 형?”
“그렇다니까. 할아버지는 경로당에 들어갈 땐 어김없이
보청기를 뺀다니까.
이 형의 말을 정 못 믿겠으면 네가 한번 미행해 봐.”
“미행? 내가 뭐 형사인가?”
내가 웃자, 형도 웃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할아버지가 왜 경로당에만 가면 보청기를
빼는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는 일단 후반전으로 넘기자. 어때?”
형은 걸핏하면 축구에 비유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휴식 시간이야.”
나는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궁금증은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두고 지내는 성격이 아닙니다. 나는 싫다는 형을 조르다시피 해서 할아버지의
뒤를 밟기로 했습니다.

미행 날짜는 일요일로 정했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할아버지가 외출 준비를 하는 사이
형과 나도 할아버지 뒤를 밟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설레었습니다. 나와는 반대로 형은 시큰둥한 표정이었습니다. 물어보나 마나 형은 아까운 시간을 뺏긴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할망구, 다녀오리다.”
할아버지는 대문을 나서면서 할머니에게
손을 번쩍 쳐들어 보였습니다.
그러고는 뒷짐을 진 채 걸음을 떼 놓았습니다.

우리는 멀찍이 떨어져서 할아버지의 뒤를 밟았습니다. 역시 미행은 짜릿한 맛이 있었습니다. 가슴은 동동 뛰었고요.
어린이 놀이터를 지나자 경로당이 보였습니다.
“영우야, 저기…….”
형이 턱으로 할아버지를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나는 형보다 먼저 보았습니다. 경로당 문 앞에 다다른 할아버지가 슬며시 손을 귀로
가져가더니 보청기를 빼 주머니에 넣는 것을.

“봤지?”
“응, 정말이네.”
틀림없었습니다. 미행은 성공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갈까 하다가 이왕 온 김에 할아버지들이 경로당
안에서 무얼 하며 지내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까치발을 하고 유리창 너머로 경로당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 미리 와 앉아 있던 할아버지들이
자리를 내주는 게 보였습니다.

“어서 오게나. 오늘은 얼굴이 더 환해 보이는구먼.”
안경 낀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의 손을 잡는 게 보였습니다.
“일찍 나왔네. 아침은 먹었는가?”
“뭐라고? 잘 안 들려.”
그 할아버지는 귀가 어두운지 안경을 고쳐 쓰며
우리 할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아침 식사를 했느냐고!”
할아버지도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응. 나 내일 시골 내려가. 우리 막내 손녀가 돌이거든.”
“방금 뭐라고 했어? 어딜 간다고?”
보청기를 빼 주머니에 넣었으니 우리 할아버지도
귀가 어둡긴 마찬가지입니다.

“시골!”
“어디라고? 시골에 간다고?”
할아버지들이 서로 쳐다보며 웃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와 형은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저렇게 안 들리는데 왜 보청기를 끼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누군가 뒤에서 나와 형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었습니다.
돌아다보니 골목집 뻥튀기 할아버지였습니다.
“너희 교장 선생님 손자 아니냐? 할아버지에게 무슨 긴히 할 얘기라도 있어 왔느냐?”
‘교장 선생님’이란 말은 우리 할아버지를 부를 때

동네 사람들이 쓰는 말입니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직을 해서
다들 그렇게 부릅니다.

“그게 아니고요, 우리 할아버지가 여기만 오시면 귓속의 보청기를 빼시거든요.
그래서…….”

형이 솔직히 다 말해 버렸습니다. 정작 궁금했던 나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고요.
“아, 그것 말이냐? 허허허.”
뻥튀기 할아버지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이미 그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여기 오시는 할아버지들은 다들 귀가 어둡단다. 그래서 그러실 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번에는 내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뻥튀기 할아버지는 껄껄대며 또 한참이나 웃었습니다.
“그래도 모르겠느냐? 여기 오는 할아버지들이 다들 귀가 어두운데
너희 할아버지 혼자만 귀가 밝으면 뭐 하겠냐.
재미 하나 없지.”
아, 나는 형을 쳐다보았습니다.
형도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러셨구나!’
나는 조금 전 귀 어두운 할아버지들이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목청을 높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할아버지가 경로당 정문에서 보청기를 빼어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는 그 비밀을 비로소 알아낸 것입니다.

나와 형은 서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제 짐작이 가는 모양이로구나. 할아버지들은 그래서 하루해가 별로 지루하지 않단다. 할아버지들이 너희처럼 귀가 밝아서 남이 한 말을
제때제때 알아들으면 하루해가 얼마나 길겠느냐.
너희는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뻥튀기 할아버지가 쓸쓸히 웃었습니다.
“그만 가 볼게요. 우리 할아버지한테는
우리가 여기 온 거 비밀이에요. 아셨죠?”

“알았다. 조심해서 가거라.”
뻥튀기 할아버지의 틀니가 아침 햇살에 반짝거렸습니다.
우리는 뻥튀기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어린이 놀이터 앞까지 아무 말도 없이 왔습니다.

형이 그제야 말했습니다.
“영우야, 오늘 보니 할아버지들 세계도 참 재미있다. 그렇지?”
“응. 꼭 아기들 노는 것 같아.”
나는 형의 손을 꼭 잡고 길을 건넜습니다.

00:00 | 00:00